“내 위에는 태양 같은 건 없었어. 언제나 밤. 하지만 어둡진 않았어. 태양을 대신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태양만큼 밝지는 않지만 내게는 충분했지. 나는 그 빛으로 인해 밤을 낮이라 생각하고 살 수 있었어.”

이 알쏭달쏭한 미호(손예진 분)의 대사는 영화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이하 백야행)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겉으로는 무결점의 백색 같은 여자지만 세상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는 여자와 그녀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주기 위해 어둠 속으로 숨어든 남자. ‘백야행’은 한 몸뚱이로 태어난 샴쌍둥이처럼 똑같은 고통과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두 남녀의 엇갈린 운명에 포커스를 맞췄다.

‘백야행’의 첫 장면은 꽤나 강렬하다. 남자는 짙은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남자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는 환한 햇빛이 내리쬐는 하얀 방에서 격렬한 섹스를 벌이고 있다. 남자의 살인과 여자의 정사 사이에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백야행’은 일본의 인기 미스터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 ‘외딴집’의 미야베 미유키, ‘밤의 피크닉’의 온다 리쿠 등과 함께 ‘미스터리 3인방’으로 불리는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초특급 대우를 받고 있는 작가로 이미 여러 편의 작품이 TV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백야행’도 지난 2006년 야마다 다카유키·아야세 하루카 주연의 드라마로 제작돼 일본 전역에 방영됐다.

히가시노 게이고에게서 이야기를 빌려온 ‘백야행’은 일단 깔끔한 모양새를 갖췄다. 3권짜리 장편소설을 무리없이 압축한 시나리오나 미호, 요한(고수 분) 그리고 한동수 형사(한석규 분) 등 주요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의 연기도 합격점을 줄 만하다. 얼룩 같은 과거를 꼭꼭 숨기고 있는 여자와 자신의 인생은 너덜너덜해져도 여자의 행복만을 기원하는 남자의 숨겨진 이야기를 퍼즐처럼 꿰맞춰보는 재미도 쏠쏠한 편이다.

문제는 결국 악녀일 수밖에 없는 여자와 그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로 살아가며 살인도 서슴지 않는 남자에게 관객이 얼마나 공감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감정이입이나 동일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에게 일말의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이 생겨야 영화를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일본 소설이나 드라마를 즐겨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는 사실도 이번 영화가 넘어야 할 산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투자와 제작을 맡은 강우석 감독은 영화의 흥행을 자신하는 눈치다. 강 감독은 “이번 작품은 누가 범인인지를 뒤쫓는 영화가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를 찾아가는 영화”라면서 “일반적인 추리영화라면 후반부에 좀 허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일찌감치 범인을 노출하고 ‘왜 그랬을까’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폴룩스픽처스의 창립작품이기도 한 이번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불가’ ‘금붕어’ 같은 단편영화로 주목받았던 박신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18세 이상 관람가. 19일 개봉.

/jsm64@fnnews.com 정순민기자